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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노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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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책 고백문
작성자 hongsulk1956
작성일자 2018-07-19
조회수 436

 


 

과유불급(過猶不及)

1.

과식, 폭식을 한다.

힘이 넘친다. 운동을 과격하게 하다 부상을 당한다.

성욕은 넘실거린다.

언행이 공격적이다.

화가 넘쳐 나오는 걸 알면서도 뒤늦은 후회한다.

나로 인해 남의 마음이 다치는 것을 잘 모른다.

주장과 입장의 표명이 과격하다.

감정이나 감수성을 가벼이 여기고 의지를 앞세운다.

자신감도 지나친다. 두려움이 없다.

가끔 자신에 대한 학대(고행)를 감행한다.


 

모두 저 스스로를 진단해 보고 정리해 본겁니다. 저의 약점이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란 옛 고사성어의 뜻이 저의 됨됨이와 삶을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날을 잠시 돌아보면서 반성과 고백의 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009년도 5월에 부산지역에서 평화통일운동에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던 단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의 부산조직이 출범되었습니다. 예상치 않게 초대 대표에 제가 선출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주로 빈민운동’ ‘노숙인 복지 인권운동에만 집중했었는데, 평화통일 운동에 몸담게 되는 배경에는 제 젊은 날에 뼈에 새겨진 사연이 있었습니다. 20대 들어 신앙과 삶의 대 전환이 있었고 급기야 군대생활을 포기하고 3년의 복역생활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전까지 열광적 기도신앙에서 변환되는 정신적 요체는 성 프란시스의 생애와 신앙에서였죠. 성 프란시스의 가난사랑평화사랑이 두 요체가 이금까지 제 삶을 지배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반 군대, 반 전쟁, 나아가 반 국가주의까지 갈 뻔했죠. 아니 어쩌면 아직 반 국가주의나 아나키즘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남아있다고나 할까요?


 

뉴밀레니엄이 열리는 2000년도 이후 자연스럽게 부산지역의 장기수 선생님이라 불리는 국가보안법 복역자 어르신들과 교분이 생겼습니다. 대개 20~30년간 교도소에서 보낸 장기수 선생님들은 대부분 우리나라가 분단체제로 들어서면서 저항하던 빨치산 출신이었습니다. 교분은 점차 전국의 장기수 선생님들까지 확장되었고,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이하 평통사)의 전국조직에도 열성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물론 반미운동’, ‘한미연합군사훈련 반대’, ‘평화협정체결’, ‘강정해군기지건설반대’, ‘싸드반대등 현장투쟁에도 가열 차게 앞장섰습니다. 특히 강정해군기지건설 반대운동은 2011년부터 1013년까지 어려운 여건이지만 제주도를 오가면서, 때론 제주도 경찰서 유치장에 포획되면서까지 격렬한 몸싸움까지 던져야 했습니다. ‘집시법위반’, ‘공무집행방해죄’, ‘업무방해죄’, ‘재물손괴등의 법에 의해 대법원까지 다투어야 했고, 결국 벌금형을 서울구치소에서 몸으로 갚고야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201512월이었습니다.


 

2013년도, 5년 만에 부산평통사대표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평 회원으로 숨고르기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1년 뒤였죠? ‘세월호 참사사건이 터진 겁니다. 그해 8월 광화문에서 유가족 단식투쟁 중 유민아빠김영오씨의 46일 단식 과정과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서울에서 그 뒤를 잇겠다고 나온 방인성 목사의 결단에 페이스메이커로 같이 가자고 하면서 눌러앉아 버렸던 게, 단식 42... 죽음의 문턱 앞에서 아슬 하게도 되돌아 온 후 오랜 회복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직도 세월호만 쳐다봐도 먹먹한 가슴을 쓰다듬고 있습니다만... 당시 세월호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국민의 마음과 역사의 심판의 때가 찼던지 2016년도에 광화문에는 촛불혁명이 불타올랐습니다.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거짓과 불통의 박근혜 정권을 끝내 끌어내렸고, 2017년도에는 탄핵선고와 구속 재판까지... , 정말 역사적 대 전환의 태풍이었습니다.


 

2.

이렇게 제가 2009년부터 2017년도까지 잠시 저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사랑으로 몸을 낮춰 노숙인 공동체 섬김과 부산역 부근의 노숙자들과 철거민들을 찾았던 제가, ‘평화사랑으로 옮겨 온 삶의 체중을 실었던 날들이었더라는 되돌아봄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독재정치 체제가 경제개발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터라, 국가가 약자 국민인 도시빈민을 함부로 처리했던 때였습니다. 이름도 좋은 도시정비사업’, ‘재개발사업’, ‘도시환경개선사업’, ‘뉴타운사업등등... 국가의 이름으로 정부가 국민을 잘살게 한다는 허울 좋은 경제성장 정책을 폈고, 그런 국가의 강제성 횡포를 휘두름에 맞서는 운동이 바로 빈민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점차 집단지역의 빈민들이 흩어지고 또 일정부분 복지정책에 흡수되어 빈민운동은 약화되었습니다. 부산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몸담고 주도적으로 투쟁했던 빈민운동 조직인 주거권실현부산시민연합이 깃발을 내린 상태였고, 이후 다시 건설한 주거복지부산연대마저도 식물조직이 된지 이미 오래된 터였습니다.


 

우리 공동체 부활의집과 같은 북구지역에 만덕5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2011년부터 주민들의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긴긴 몸살이 이어왔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가까운 지역이면서도 알지도 못했고 2013년경에야 알았으면서도 가까이 할 마음도 계기도 일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신생 빈민단체 반빈곤센터나 오랜 철거민지역 대연우암공동체가 열심히 주도적으로 연대하고, 또 부산지역 시민사회 여러 단체들이 연대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빈곤센터 대표인 윤웅태 동지가 갑작스레 사별했다는 겁니다. 그 동지는 예전 주거복지부산연대의 조직에 집행위원장으로 헌신했다가 반빈곤센터를 조직한 가난한 빈민운동가였습니다. 아직 창창한 40대였는데 씽글로 운동에만 묻혀 살다 몸 건강관리를 소홀한 이유인지 병을 얻어 이기지 못하고 끝내 가버렸습니다. 아직 겨울바람이 차가운 2월 어느 날, 윤웅태 동지가 솥발산 묘소에 묻히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 앞에서 약속했지요. 만덕을 찾아 가겠노라고...


 

만덕 5지구 철거지역을 첫 방문하던 날이었습니다. 계단식으로 주거단지를 조성한 넓은 터가 거의 철거되어 황량했고, 전봇대만 드문드문 서 있는 가운데 남아있는 집들 몇 채만 보였습니다. 폐허 같은 터 한 가운데 쯤 2층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 옥상에는 망루가 보였습니다. 망루 위와 주변 곳곳에는 처절한 주민들의 소리가 담긴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불과 10여 가구도 남지 않은 상황. 주민대표는 망루에 올랐고 비장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철거용역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긴박한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밤중이나 새벽 쯤 맞이해야 할 그 순간을 대비해서 매일 밤을 그곳서 보내기로 마음먹고 갔던 겁니다. 연대 단체들과 주민들이 가끔씩 집회를 열기도 했고 대책회의와 방문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음식과 술, 노래와 토론으로 연대의 일체감을 다지는 밤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연대의 날 집회가 있었고 뒤풀이 술자리가 벌어졌습니다. 거의 자리가 파할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젊은 부인의 소리 지르는 곳에 눈길이 갔습니다. 주민으로 알고 있던 부인인데 열심히 투쟁대열에서 함께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대단체 활동가들과도 교분이 가깝고 스스럼없이 지내던 분이었는데, 웬일인지 화가 잔뜩 나 활동가 하나를 붙잡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활동가는 나와 가깝게 지내는 전도사였는데 멱살이 잡히고 난처한 표정으로 수세에 몰려있는 것 같았습니다.


 

니가 뭔데 남의 가정사에 껴들어.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인이 잡은 팔을 걷어내면서 그 전도사에게 어서 달아나라고 쫓았습니다. 전도사는 멀리 달아났고 그 여인은 내게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뿌리친다는 게 여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좀 미안하기도 했지만 여인은 좀 누그러졌고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사라졌습니다. 얼마 뒤 후배 전도사로부터 그 K여인과 가정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잦은 술과 폭행 그리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는... 참으로 딱하고 상처로 가득한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간혹 아이들을 데리고 집회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나 내게 원심을 품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뒤 1톤 두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떠나던 날. 여인은 펑펑 울면서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고 남은 주민들도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 잘 살어. 아이들 잘 키우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망루에 있던 대표가 협상이 되었다며 내려왔고 주민들 사이에는 협상결과를 놓고 분열이 생긴 겁니다. 연대단체들도 곤혹스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던 주민들도 갈라지니 하나 둘 이사를 나가고 불과 네 가구만 남았습니다. 주도적인 연대단체마저도 물러가자 나머지 연대단체 10여 단체와 주민 네 분이 다시 조직을 추스렀습니다만 결기는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새벽 운동을 다녀 온 사이 어이없게도 포크레인 한 대가 와서 간단히 망대를 쓰러뜨리고 주변 빈 가옥 몇 채도 주저앉히고 말았습니다. 주민들은 물론 어떤 누구도 저항한번 못하고 허탈해 했습니다. 그 뒤 주민들 한 분 한 분 LH 공사 사무실을 번갈아 방문하고 돌아오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처음 결의를 다지고 온 목적은 황망히 사라졌지만 그래도 마지막 한분이 떠나기 까지 밤을 그곳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결국 네 가구 주민들이 모두 합의를 보고 이사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네 가구 중 두 분의 이사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연대단체에서도 10여명 이상 함께 축하하고 위로하는 자리여서인지 융숭한 대접으로 보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했던 만덕 5지구 철거현장은 그렇게 허망하게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 만덕은 기억에서 점차 잊혀져갔습니다.


 

3.

2018년 무술년. 122일 교단총회에서 9년 전 저의 출교 건에 대한 사면복권이 홍역을 치르면서 어렵사리 통과 되자 이곳저곳에서 축하의 전화가 왔었습니다. 뭔 축하받을 일도 아닌데... 아무튼 우리교단 창립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고 전국 기독교의 수많은 교단들에서도 이례적인 일이긴 했습니다. 131. 이날도 말일이라 노숙인들 생신일 맞은 분들 축하의 소연이 있었습니다. 매월 그달 중 생일이 있는 분은 모두 모셔서 합동으로 축하해 드리고 축복해 드리는 뷔페식당 자리였습니다. 20여명 노숙인분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후배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형님, 혹시 미투 관련한 페이스북에 올랐던 것 형님 얘기 같던데 보셨습니까?”

아니. 내 얘기라고?”

누가 캡처해서 보내준 건네 일단 보시고 전화 한번 주십시오?”

, 그러지.”


 

궁금했습니다. 설마하며 카톡 메시지를 열어보는데... ! 이럴 수가 적나라하게 그때 그 광경이 밀려왔습니다. 18개월여 지난 오늘 부끄러운 나의 치부가 백주에 공개되어버린 겁니다. 머리끝부터 아득해지면서 온갖 생각들이 순간에 엉켜 붙었습니다. 캡처된 내용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K○○


 

만덕5지구 주거생존권 투쟁 때 일이다.


 

만덕에서 망미동으로 이사 나오고 어느 날 박ㅈㅌ 어르신이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는 말씀에 아이 둘을 데리고 만덕으로 달려갔다. 사랑방 앞 천막에서 아이들과 하룻밤을 자기로 했고 그 천막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자다가 누군가 나를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옆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나의 가슴을 만지고 키스를 퍼붓던 김ㅎㅅ목사...

순간 놀라서 천막을 뛰쳐나왔고,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혼자 삼켜야 했다. 묻고 싶다.

연대라는 이름 뒤에 더러운 탈을 쓰고 있는 김ㅎㅅ 목사...

부산 노숙인의 대부라고? 웃기지 마시라!(물론 CCTV도 증명할 증거도 없으니 발뺌하면 그만일 테지... !)


 

2018. 01. 31



 

허겁지겁 생일축하 식사자리를 파하고 그 후배 K목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우님, 늦었지만 시간 좀 내 주시겠나?”

, 형님. 교회에 있습니다. 근처 와서 전화주지요.”

그럼세.”

천천히 운전해 오십시요. 형님.”

고맙네.”


 

후배 K목사는 당시 부산NCC(기독교교회협의회)의 총무였고 만덕 5지구 연대단체로 대책위원회의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철거현장의 역사를 꿰고 있었고 간간 나와 중요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었던 분이었습니다. 우리 둘은 모라동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참으로 후배 K목사 앞에서 참담했습니다.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습니다.


 

형님, 갑작스럽게 황당하고 속 상하셨겠습니다.”

오늘은 이 일로 자네와 처음 자리니만큼 후배지만 고해성사하는 맘으로 왔네.”

고해성사요? 아닙니다, 형님...”

아냐, 아냐? 이 자리는 자네와 나 둘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그분도 계시 잔나. 부끄럽네만 들어주시게.”


 

나는 K목사에게 민망하지만 그날 밤의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고백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K여인이 페이스북에 폭로한 내용과 비슷하지만 더 상세하게 반추하며 더듬어 갔습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도 저녁에 여럿 다녀가는 분들과 한잔 한 것 같애. 늦은 밤 모두 떠나고 주민 세 분마저도 자기 집으로 다 들어가셨어. 매일 밤 그렇듯 사랑방에는 박씨 어르신과 천막에는 나 혼자 이렇게 자는 일이 많았지. 그날도 천막에는 나 혼자였어. K여인은 막 자리를 펴고 잘 즈음 온 것 같아. 아마도 사랑방에서 박씨 어르신과 얘기 나누고 들어 왔나봐. 나는 인기척에 일어나 그녀와 아이들의 잠자리를 깔아 주었지. 그녀는 아이 둘을 양쪽에 끼고 누웠고 나는 아이 옆으로 가에 누웠어. 아이들은 늦은 밤이라 얼마 후 새근새근 잠이 들었나본데 나는 두근두근 잠이 잘 안 오는 거야. 분위기는 내 젊은 날 아내와 아이들과 자는 형국이었는데, 왠지 측은 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하면서도 욕정이 발동하더라고. 지난 번 언젠가 본의 아니게 내 동댕이친 게 걸리긴 걸렸나봐. 그건 그거고... 여튼 내 손은 어느새 셋이서 덮고 있는 이불위로 그녀의 가슴까지 갔어. 자꾸 내 손을 밀어내더라고. 아이들은 자는데 깰까봐 신경은 쓰이고 여러 번 시도해도 내 손을 걷어내어서 이젠 손을 잡고 내 쪽으로 오라고 슬쩍슬쩍 잡아 당겼지. 다시 몇 번 끝에 일어나서 아이를 건너 내 쪽으로 오는 거야. 내 옆으로 오는 순간 가슴이 젊은이처럼 쿵쾅쿵쾅 뛰더라고. 극도로 흥분되어서 내 옆으로 눕자마자 격렬하게 애무와 키스를 주고받았지. 내 긴 코 수염과 구레나룻 수염은 아무 상관이 없었나봐. 그래서 나는 거의 격정에 휩싸여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마지막 욕구로 밀어붙이려 했어.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완강히 걷어내고 일어나더라고. 그러곤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때 나는 갑자기 온 몸이 식어지면서 정신이 확 들었어. 또 이상한 허탈감이 밀려오고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엉켜 붙잖아. 한 참 후 그녀는 살금살금 들어와 말없이 자기 자리로 누웠고 나도 아무 말도 없이 복잡한 생각들을 억지로 누르고 잠을 청했어. 새벽 날이 밝자 아이 둘을 챙기고 나가더라고. 천막 옆 사랑방 박씨 어르신과 인사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나는 잠에서 깨었으나 누운 채로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녀가 간 뒤에 씁쓸하고도 허허로운 심정과 어딘지 미안하고 민망스러운 양심의 꾸짖음이 있었다고 할까. 편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연락처를 알아내서 좀 미안했다고... 내 절제 없음의 행동에 자책한다고 말하고 그녀가 혹시 받았을 수치심이나 상처를 확인하고 사과했어야 하는 건데, 그냥 짓눌러 오래토록 묻어버리려 한 거야. 내 스스로에게 괜찮아, 그녀도 받아 준거야’, ‘그 정도는 세상에서 다 묻어두고 사는 거야하며 두둔하고 합리화해 버렸어. 마음속에 찾아와 양심을 두드렸던 천사의 소리를 끝내 외면하고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혀버렸고 세월을 보낸 거지.”


 

미안하네. SNS에 폭로해 버렸으니 나 자신보다도 앞으로 파장이 NCC는 물론 진보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이 갈 건데...”

무슨 말씀을요. 형님, 너무 성급하지 않게 차분하고 냉정하게 같이 대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오면서 생각했네만 아무래도 정면돌파하는 방법이 내가 가야할 길일 거 같애.”

정면돌파요? 어떻게요?”

직접만나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지.”

, ... 그게 좋겠네요. 역시 형님다운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 도중 재빨리 그녀의 페이스북 계정 메시지에다 사과 글을 작성했습니다. 작성한 글은 후배 목사에게도 보여주며 괜찮겠냐고 하자 좋다고 했습니다.


131일 오후 9:42


 

○○, 오늘 올린 글을 보고 누가 알려줘 확인했습니다. 마음속에 떳떳치 못해 무거웠지만 그래도 한쪽엔 받아줬거니 하며 양심을 눌러왔었죠. 그러다 오늘 글을 직접 페북에서 확인하고 화끈거리고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게 됬습니다만 무슨 대수겠습니까? ○○씨 마음이 아픈 상처라면, 아니 내 양심이 부끄러운데...


 

직접만나 사죄라도 해야겠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단둘이 부담스럽고 두렵다면 원하시는 분 참관해도 무방합니다. 진정한 사과에 체면이나 명예는 생각지 않습니다.


 

답신 진심 부탁합니다.


 


우리는 메시지를 보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답변이 오려나하고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소식이 왔습니다. 개인 메시지로 온 게 아니라 자신의 계정 게시판에 방금 제가 보낸 개인 메시지 내용을 붙였습니다. 게다가 글꼬리에 방금 메시지로 김○○ 목사가 보내왔다면서 나는 2년을 힘겹게 묻어오다가 어렵게 올렸는데, 이렇게 빨리도 사과하며 응답해 오니까 당황된다.’는 얘기도 달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개인 메시지 답신이 오지 않자 원칙은 우선 정면돌파로 하되,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서 법률적 자문을 받아보는 것도 고려해 보기로 했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온라인상에는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부산지역에도 K여인과 연관된 페이스북 네트웤이 빈민 및 진보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하룻밤 사이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특히 그녀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내 폭로문에 바로 이어 또 다른 더 선정적(술 취한 자신을 숙박업소에 옮겨놓고 자신의 알몸을 사진 찍었다는)인 폭로문이 있어서, 몇몇 지인은 뒤 내용과는 아무관계 없냐고 확인전화까지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날 오후에는 기다리던 첫 개인 메시지로 짧은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21일 오후 3:17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정리를 해야 좋을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겠습니다. 좀 기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요. 그래서 조금 뒤 메시지 응답을 아래와 같이 보냈습니다.


21일 오후 3:45


 

아네~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라도 응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어제 밤 답신대신 제 사과 메시지 페북 올린 것 잘 봤습니다. 고민하시다 내리셨더군요. sns 상의 글들은 재생산 효과의 파급만 크지 진정성 있는 문제 해결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게 효과적인 뭔가를 받으실 목적이 아니라면 단둘이 만나 마음과 마음의 직접 해결이 진실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지른 결과는 너무 크고 ○○씨는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그날 밤 잠시의 착각이 오늘에야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30년 빈민과 함께하는 제 인생에 처음 겪는 아픔입니다.


 

저는 다 망가지고 바닥으로 나뒹구는 진짜 노숙자로 갈 준비는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정도로 그간 상처받으신 마음이 해소가 덜 되었다면 대면하여 제 모든 것 던지고 진심의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하오니 제 메시지처럼 처음올린 글은 이젠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의 평정이 돌아오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저에 대한 미투 폭로사건은 부산지역 시민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129서지현 검사 미투폭로가 나온 뒤 이틀째에 나왔기에, 부산지역에서는 저의 폭로사건도 메스 미디어로 확장될 가능성이 눈앞이라 긴장의 하루하루였습니다. 시민사회계와 기독교계의 단체들에서는 노심초사로 부심하였고 신속히 진화하느라 대책모색에 부산했습니다. 특히 부산NCC에서는 부산목정평부산예수살기공동으로 입장문을 발표하기로 하고 25일 피해자 측에 보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라는 연락도 받았습니다.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부산 기독단체 입장문입니다.


 

2018131SNS에 올린 ○○○씨의 김홍술 목사에 대한 성추행사건에 관하여 기독교단체는 아래와 같이 입장을 표명한다.


 

기독교 성직자인 김홍술 목사의 부끄러운 행위에 관하여 유감을 표한다.

김홍술 목사는 피해당사자에게 진정성 있게 사죄하고 공개사과문을 요청하기로 한다.

김홍술 목사의 회원자격을 즉시 정지하고, 징계절차는 추후 신속히 결정한다.


 

2018. 2. 5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부산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부산예수살기



 

그리고 하루가 지난 날 26일이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피해자 K여인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일주일 만이었습니다.


26일 오후 9:57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 지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거론 안 하겠습니다. 목사님도 저도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서울에서도 전국예수살기에서 지도부가 모여 긴급대책 모임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총무 Y목사는 여러 차례 진행상황에 대해 공유를 하였고, 상임대표 K목사는 친구로서 못할 짓이지만 조직 현실상 불가피 한 점 이해하라면서 속 깊은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피해자 측에 보냈다고 합니다.


김홍술님의 부적절한 성추행 사건에 대한

전국예수살기의 입장


 

이 땅의 평화를 빕니다.

전국예수살기는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제 숨을 쉬는 세상, 그 자유로운 세상 건설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불의한 세력에 의해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에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부 성추행 폭로를 지지했고 유사 성폭력과 성추행도 철저히 조사하여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전국예수살기 회원인 김홍술님의 부적절한 성추행에 대하여 한 없이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며 피해 여성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함께 길을 걸어왔던 사회시민단체에게도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쳐 송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에 전국예수살기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합니다.


 

김홍술님의 부적절한 성추행은 가장 높은 도덕성을 담보해야 할 성직자로서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김홍술님은 피해 당사자에게 충분히 사과해야 하고, 피해 당사자와 시민사회단체에 납득할 만한 응당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전국예수살기는 김홍술님의 교회갱신위원장직과 회원권을 정지합니다.

전국예수살기는 앞으로도 더욱 우리 사회 약자들과 손잡고 평등세상 건설에 앞장서겠습니다.


 

201827

전국예수살기 상임대표 김○○


 



 

저는 약속대로 공개사과문을 써서 내기로 했습니다. 27일 단숨에 작성하고 부산과 서울에 각각 보냈습니다. 공개사과문은 바로 K여인 페이스북 계정에 포스팅되었고 저도 제 계정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몇몇 지인들이 전화가 와 피해자가 올리면 됐지 굳이 자신이 올릴게 뭐냐고 지나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내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얼굴에 내가 스스로 붙임으로서 스스로 벌을 받음이 마음은 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올렸습니다. 그녀는 그 후 일주일 만에 내렸지만 저는 장기간 놔두기로 하였습니다.


 

4.

공개사과문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공개사과문


 

친애하는 김○○, 그리고 오늘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존경하는 시민사회계 동지여러분께 드립니다. 지난 131일에 공개된 20165월 경 만덕 5지구 철거민 투쟁 현장에서 일어났던 저의 성추행사건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려 필을 들었습니다.


 

우선 위 피해자 김○○님이 페이스북에 용기를 내어 고백적인 고발의 내용에는 변명할 여지없이 채찍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당일즉시 직접 김○○님에게 2회에 걸쳐 사과의 의사를 메시지로 보냈습니다마는, 피해자의 심정은 되살아나는 상처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저는 빈곤과 소외의 삶을 경험하는 주민에게 다가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연대의 투쟁에 작은 불씨로라도 함께하고자 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회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충동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부끄러운 행동은, ○○님께 지난 2년은 물론 평생 생채기로 남게 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26일 마음을 푸는 뜻의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다시 한 번 무엇보다도 먼저 김○○님께 용서를 빌며 다시 한 번 사죄를 간청합니다.


 

두 번째로 저는 피해자가 지적하는 대로 사회적으로 이른바 성직자라고 칭하는 목사로서 부끄러움입니다. 사람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기에 앞서 제가 영혼을 다해 경외하고 모시는 하느님 앞과 양심을 두고 숨어버릴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여전한 죄인으로 남습니다. 순간의 행동 뒤 아침에 아이들과 떠나는 피해자에게, 아니 그 뒤에라도 상처 난 영혼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그냥 애써 묻어버리려 했을까. 그때 밀려왔던 어딘지 미안한 마음, 불편하고 무거웠던 심정으로 하느님이 내 양심에 두드렸건만 그냥 눌러버렸습니다. ‘그녀도 수동적으로 받아 준거야라고 내 스스로 정당성을 두둔하면서, 여전한 무거운 마음을 아득한 바닥으로 가라앉히려 했습니다. 참으로 그 행동보다도 더 어리석고 부끄러웠던 지난 세월을 참회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의 길을 뒤따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구기 위해 함께 했던 기독교계 단체 및 동지여러분과, 분단과 자본의 세력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조국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불철주야 정의로운 투쟁에 몸을 던지는 시민사회의 단체 및 동지여러분께, 너무 실망스럽고 분노를 안겨드려서 무어라 할 말이 없습니다. 특히나 촛불혁명 이후 적폐의 세력과 마지막 전력의 싸움에서 이렇게도 어이없는 개인의 과오로 인해 크나큰 실망과 짐을 안겨드렸습니다. 몇 달이나 몇 년의 자숙기간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마는 동지 여러분들의 연대의 대열에 다시 설수 없다 하더라도 저는 긴긴 반성과 자숙의 기간을 스스로 가지겠습니다. 부산지역 뿐 아니라 전국 제가 활동하고 있는 모든 단체에서 물러나 광야로 나가 몸과 마음을 다시 바로 세우겠습니다.


 

더군다나 사회구조적으로 연약한 여성에 대한 억압기제가 아직도 만연한 이 시대에, 부지불식간에 저 또한 그 대열에 서 있었음에 다시 한 번 민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간에 사랑과 질책으로 또 비판과 응원으로 보내주시는 마음들을 기억하며 충실히 진심을 다해 다시 태어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27일 부활의집에서 김홍술 드림


 


 


한편, 그녀는 페이스북 자신의 계정에서 내 폭로문은 내렸지만 알몸사진의 폭로문은 계속 둠으로 해서 차츰 문제의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용기 있는 미투행동에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분들과 의심과 비난의 글로 공격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비난하는 자들은 주로 운동권 단체를 통해 그녀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로서, ‘알몸사진폭로문의 가해자로 지목하는 사람이 사실 알고 보니 치정의 관계로 지내던 사람이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철거투쟁 시절부터 문란한 남녀관계가 있었다느니 하면서 공격을 하는 겁니다. 심지어 아이 둘을 내세워 생활고를 코스푸레하고 있다며 앵벌이에 불과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녀는 알몸사진을 찍었다는 그 가해자를 형사 고소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 가해자라는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알몸사진폭로문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의 내면에 싸움에만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시나브로 그녀의 문제를 떠나 저 자신의 문제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노골적으로 제게 목사님이 너무 자학할 건 없다. 그녀의 문제에 목사님이 걸려들었을 뿐이다며 저를 흔들어 대는 겁니다. 하지만 전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27일부로 부산지역의 모든 참여하는 단체는 탈퇴하고 외부활동은 중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카톡이나 밴드 등 단체나 모임에서 모두 빠져나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소속교단의 문제였습니다. 그 어렵게 주변의 도움으로 또 교단총회의 몸살을 거쳐서 출교라는 엄청난 징계로부터 사면복권이 되었기에 큰 고민이었습니다. ‘이제 목사라는 직에 연연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마침내 때가 찼고 하늘의 뜻도 내게서 거두는 거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29일이었습니다. 예전 세미나 때 쓰던 목걸이 명찰에다 미투 나는 성추행한 죄인입니다. 심고라고 큰 글자로 넣고 밖에 나갈 때 걸고 다녔습니다. 앉아도 서도 가슴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너무 잘 보이는 모양인지, 특히 지하철에 앉으면 시선 고정하기가 간단치 않았습니다. 어느 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데 앞에 앉아있는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옆자리의 젊은 부인에게 조용히 미투가 뭐예요?’하는 겁니다. 20~30대 청년들의 눈길, 40~50대 중장년의 눈길, 60대 이상 노년층의 눈길, 모두 조금씩 다른 것 같았습니다. 아니 주는 눈길 속에서 보내는 느낌보다 내 스스로 받는 느낌이 더 강렬했다고 할까요. 쏟아지는 돌팔매질의 뭇매라 할까, 화살이나 레이저 광선 같이 파고드는 게 있었습니다. 만덕에서 어느 날 저녁 그녀를 내동댕이쳤던 저를, 운명의 여신 미투는 그녀를 통해서 이렇게 오물이 질퍽한 거리에 내동댕이치시나 봅니다.


 

219일 교단의 지방회장을 만나러 전주에 갔습니다. 간곡한 권고에 미투 목걸이도 떼고 교단에 자진 목사반납도 스스로 안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왔지만 3년간 미투 목걸이를 하려던 걸 단 10일 만에 떼어버렸으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3월 첫 주일에는 교회 앞에 고백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와 수염을 깎기로 맘먹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이발기도 주문했습니다. 이윽고 그 날이 왔습니다. 옛날 20여 년 전 부활의집 형제 중 당시 무덤체험수행에 나의 관을 직접 땅속에 묻어 준 한 분을 불렀습니다. 형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목사님의 뜻을 따르겠다면서 내 머리를 깎아주셨습니다. 내 생애 연극에 두 번이나 출연해 소중한 엑스트라 역을 기꺼이 맡아주신 겁니다. ‘삭발식은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려서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오래 굳혀있던 나의 상투와 긴 수염 이미지여서인지 보고 만나는 사람들 반응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10일정도 지났을까? 13일이었습니다. 낮부터 갑자기 전화통이 불이 나게 울려대고 여러 기자들이 큰 카메라를 메고 부활의집까지 몰려왔습니다. 부산일보에 난 보도를 보고 왔다는 겁니다. ‘아차! 어젠가 부산일보 기자가 전화가 와서 뭔가 느낌이 그랬지만 그래도 친절히 대답해 줬더니...’ ‘그럼 이 많은 기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앞을 가렸지만, 그냥 침착하고 담담히 그리고 친절하고 진정성 있게 대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방으로 모시자 합동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썰물처럼 물러갔고 결국 받아 적는 미디어까지 20여 언론이 나팔을 일제히 불어댔습니다. 이미 다 당사자 간 화해했고 부산지역사회나 특히 여성계 단체에서도 자제하는 등 더 이상 번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걸 입니까! 계속 페이스북 계정에 남겨둔 공개사과문때문이었던 겁니다. 그제야 부산일보를 열어보니 2면에 톱기사로 머리기사마저 선정적인 목사가 성추행, 부산종교계 미투 터졌다였습니다.


 

온라인에 이어 오프라인까지 완벽한 끝내기로 확인사살이 완성되고 말았습니다. 그간은 젊은 층과 운동권 누리꾼에 의해 알음알음 퍼졌겠지만, 이젠 신문과 방송(메인 방송 3사만 빠짐)이 무차별적으로 보도했으니, 예전 빈민운동가, ‘노숙인의 대부로 알려진 김홍술은 목사란 라벨마저 뜯겨 내 쫓김(파문)당한 한낱 잡놈에 불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활자 인쇄와 영상매체가 주는 신뢰의 광고효과는 가히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저 김홍술의 가슴에 주홍글씨는 죽을 때까지 아마도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기자들이 교단본부에 확인전화까지 해댄 모양입니다. 지방회장, 총무 등 목사님들이 전화가 왔고 필경 나 스스로 처음 맘먹었던 자진사퇴를 다시 끄집어 내야했습니다.


 


 

총회장님, 사직합니다.


 

유난히도 매서웠던 지난겨울, 언제 그랬냐는 듯 봄기운이 따스하게 대지를 덮어주고 있군요. 그런 봄기운과 같은 따스한 주님의 은혜로 인사 올립니다. 아울러 총 회원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평화의 인사드립니다.


 

먼저 지난 122일 총회가 열리던 첫날 저녁이 생각이 나는군요. 저의 복권문제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격론이 벌어지던 날 말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려와 염려로 반대하는 분들... 그러나 기회를 주자는 분들... 결국 해서는 안 될 표결까지... 다들 부족한 저를 사랑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결국 복권가결이란 결정에 저는 5년 근신은 물론 복음교단에 머무는 마지막 날까지 낮추는 자세로 저의 현장 자리에서 머물 것을 다짐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계획은 다른데 있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복음교회에 몸담고 있던 지난 20(1989~2009)의 세월동안 복음교회, 이건 아니다’, ‘복음교회다운 교회를 세우자고 무던히 몸부림 했었습니다. 밖에서도 암울한 우리 땅의 현실... 우리 교회의 모습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43년을 싸워 왔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것은 밖이 아니라 오롯이 저 자신 안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아주 작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무시해 버린 저에게 모진 채찍을 들기로 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아주 진짜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기로 작정하셨나봅니다.


 

서지현 검사의 이른바 미투폭로가 있던 이틀 뒤, 131일에 폭로된 저의 감춰졌던 부끄럽고 민망한 사건을 백일하에 들춰내셨습니다. 힘없이 쫓겨나는 철거민 민중여인... 그녀의 입을 통해 매를 드셨던 겁니다. 저는 당일 즉시 그녀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했고 며칠 후 그녀는 제게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로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며칠 부산지역 시민사회에서는 혼란스러웠지만 부산지역은 물론 전국 기독교계의 발 빠른 조처가 뒤따랐던 몫도 컸습니다. 저는 기독교계의 입장문에 발표한 약속대로 공개사과문을 내기로 했고, 27일 페이스북에 게시한 걸 피해자도 받아 자신의 계정에도 올렸습니다.


 

그런 뒤 일주일여 만에 그녀는 공개사과문을 자신의 계정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변에서 그 정도면 되었으니 내리라는 권면전화에도 불구하고 내릴 수 없었습니다. 내 자신의 용서가 아직 마무리가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순간의 욕정을 제어하지 못했던 부끄러움보다,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스스로를 두둔하며 합리화했던 자기기만 죄책감이 점점 저를 옥죄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던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지방회장에게 뜻을 전하려고 전주까지 찾아갔었습니다. 10여 일간 목에 걸고 다니던 미투, 나는 성추행한 죄인입니다란 명패를 단채로 말입니다. 하지만 후배인 지방회장님의 간곡한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10여명도 채 안 되는 우리 공동체 교인들 앞에 고해성사를 하고, 오랫동안 상징처럼 이미지화 되어버린 상투와 수염을 미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또 제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공개사과문도 장기간 제 마음이 허락될 때까지 게시하여 두기로 했습니다. 27일 이후 312일까지 사건의 파장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고 잦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일보의 뒷북치기 보도가 2차 파장에 불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온라인 오프라인 온 언론 매체들이 받아 적기로 번져나가더군요. SNS 상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빗발치는 기자들의 전화와 내방에 최선의 친절과 진정성으로 대했습니다. 그렇지만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가지 않도록 당사자의 허락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피해자 그녀에게도 문자로 알렸구요. 예상과 달리 그녀는 보도에 적극 협조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두 주님이 예정한 섭리였을 겁니다. 이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던 제가 오롯이 받아야 할 몫이라고 담담히 수용할 뿐입니다.


 

총회장님,


 

사직의 변이 쓰다 보니 늘어지고 말았군요. 저는 이제부터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안수하여 맡겨주신 교회의 성스러운 목사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부자격자입니다. 아니 교단을 넘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목사라는 직책도 격에 맞지 않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이미 우리사회에서는 기독교와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정신과 실천을 따르려는 교회가 남아 있는 이상 저 같은 부 자격 목사는 물러남이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법에 따라 저의 목사직을 거두어 주시고 교단의 누가 되지 않도록 조처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인간적으로 오랜 정분과 동지애를 나눴던 교단내의 선후배님들과 교우님들, 또 기독교계 진보적 운동의 선후배 동지들 그립고 아쉽습니다. 간디는 기독교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라 했다지만, 기독교에는 물러가더라도 예수님에게는 아직 사표낼 자격은 아닐 터이기에, 노숙인 형제들의 삶의 바닥에 더 깊이 천착하며 남은 생을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떠나는 저를 위해서도 기도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사랑합니다.


 

2018314일 부활의집에서 김홍술 드림


 

벌어놓은 돈도 없고 가족들로부터도 멀리 나온 것도 아득하고, 이제 남은 건 세상에서 그간 쌓여진 알량한 지위나 명예였는데... 나를 아껴주고 이해해주고 지지해 준 친구요, 동지요, 지인들이 울타리였는데... 모두 다 떨어지고 떠나고... 어느 날 하루아침에 아주 하찮게 여긴 순간행위가 거대한 빙하덩어리로 되돌아와 여지없이 깔아버린 겁니다. 그냥 빌어먹고(후원으로) 사는 부활의집에서 작은 형제들과 한 끼 한 끼 연명하는 것만 그대로입니다. 아마 머지않아 후원도 끊어질 것이고 스스로 부활의집을 떠나 거리로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광야의 고독한 영혼으로 살라하시니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임박한 모양입니다.


 


지금 부활의집에는 다섯 형제가, 요양병원에는 세분의 형제가, 독립해 나간 영구임대주택의 세분 형제, 오매불망 우리 집에 살고 싶어 하는 노인요양원 자매 한분이, 날갯죽지 다 떨어진 저를 여전히 목사님, 목사님하며 쳐다만 보고 있는데... 저 대신 운전대를 잡고 뒤를 이어 운전해 주실 분은 보내주시지 않고 운전대를 놓으라고만 다그치십니다. ! 어떻게 하지요? 무술년 사순절은 침묵만 흐르고 고난주간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군요. 주님의 신음소리인지 저의 신음소리인지 분간이 어렵습니다. 밖에는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가 스산한 바람과 함께 더 몸을 움츠리게 합니다.


 

2018321일 부활의집에서 김홍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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