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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1000일 기도에 불러보는 1000명의 영혼들(10명)
작성자 hongsulk1956
작성일자 2019-07-20
조회수 219
 

91일차/ 2018.11.14.()

유S만 형제(1958년생)

1995811일 입주. 강원도 정선이 고향이신 유 형제님은 어릴 적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부친의 사업으로 어린 시절은 유복하게 지냈으나 부친이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재혼과 더불어 급기야 형님 여동생 둘과 함께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학교도 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3남매는 남남처럼 흩어지게 되었고 특수일, 배 타는 일, 목공, 문공장 등을 전전하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릴 적 고아원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오래 다닌 적은 있으나 신앙심은커녕 기독교에 대해서는 반발심만 남게 되었습니다. 25세에 이르러 어느 날 취중 옥상에서 추락하여 온 몸에 마비증상이 왔었습니다. 병원에서 오랜 치료 후 거의 낳았으나 지금도 그 후유증에 양 다리와 종아리 아래로 약간의 마비 증세를 갖고 있습니다. 유 형제님은 한 때 동거하던 여인이 있었으나 방황하는 생활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고, 지금껏 의지할 곳 없이 이곳저곳 배회하던 중 어느 날 지나가다가 본 회의 간판을 보고 들렀다가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유 형제님은 끝내 94일 강제퇴거 조치로 떠났으나 이듬해 114일 찾아와서 형주병원(정신병원)에 입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찰에 의뢰하여 행려환자로 입원하여 지냈는데 53일 부활의집에서 착실히 잘 지내보겠다고 하여 퇴원하였으나 나오자마자 떠나버렸습니다. 공동생활에서 하루도 잔잔할 날 없는 것도 어릴 적부터 불신이 짙게 배어 형성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딜 가나 관계가 힘들게 사실 수밖에 없는 형제님들... 측은함이 밀려오네요. 주님의 사랑으로 녹여져 새롭게 재창조 되어야 하는 건데... 다 저의 부족함이 큽니다.


 


 

92일차/ 2018.11.15.()

김M옥 형제(1950년생)

1995819일 입주. 부산 영주동이 고향인 김 형제님은 어릴 적에 모친을 여의고 초등학교는 겨우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 소년 시절을 친구와 사귀면서 오로지 놀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차서 군 입대나 제대는 다행히 무사히 마쳤는데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가스배달 등 약간의 일을 해 보았으나 꾸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친구들과 빈둥빈둥 노는 생활로 청년시절도 보내던 중, 1979년도에 어찌어찌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두 딸을 두고 끝내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아이는 부인이 서울에서 양육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 형제님은 1989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약간의 분배상속 받은 재산으로 방을 얻어 얼마간 지냈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술로 탕진하면서 방도 날리고 간경화까지 겹쳐져 급기야 부산의료원 시료과에 실려 간 신세가 되었습니다. 김 형제님은 행려환자들이 즐비한 열악한 병상에서 뒤 늦은 후회와 뉘우침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이 어느 정도 추슬러지자 그곳서 착실한 봉사생활을 하던 중 원목실을 통하여 추천을 받고 재활의 삶을 살고자 부활의집 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김 형제님은 한동안 앞서 열심히 행상 장사를 하던 김점태 형제와 어울려 장사를 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023일부터 음주와 무단외박 등 며칠을 소란스럽게 갈피를 잡지 못하더니 1025일 자진해서 퇴거하고 말았습니다. 이 하늘아래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딘가에 사시겠죠.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빌어봅니다.


 


 

93일차/ 2018.11.16.()

신Y수 형제(1959년생)

1995821일 부산의료원에서 퇴원하여 입소하였고 1959105일생 올해 37세입니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신 형제님은 부친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재가 해버린 어머니와는 끝내 정을 붙이지 못하고 14살 때 해남읍에서 식당 등에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19세 때는 서울로 올라가 근 20여 년간을 세차장, 식당, 청소부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8년 전에 찾아 온 당뇨병에 지금까지 시달리고 있으며, 급기야 3년 전에는 백내장 수술을 하였으나 그 후유증으로 현재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내려온 지 3개월 정도 되었는데 부산의료원 시료과에서 퇴원 조치가 안 된 상태에서 부활의집으로 입소한 형제님은, 3년 전에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와 여동생이 살고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간 홀로 외로이 지내어 그 표정이 어둡기만 했습니다. 형제님은 입소 후 두 번째 입원하였던 지난 1996128일 결국 당뇨 및 신부전증의 사인으로 돌아가셨으며 애빈교회 장으로 장례를 하였습니다. 고단한 인생이 하늘 아버지의 품에서 위로와 쉼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94일차/ 2018.11.17.()

최B철 형제(1948년생)

1995920일 입주함. 전북 완주가 고향인 최 형제님은 홀 어머니와 7남매 가족의 장남이었으나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 일찍이 가족부양의 책임감에 부산에 와서 신발제조업체에 취직하여 가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 중 결혼 전 낳았던 한 아들을 들여오던 일로 아내와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1987년에는 해운대에 있던 한 정신질환자 복지시설(햇빛 요양원)에 취직했는데 요양원 재직 시 아내와 합의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후 마음이 타락하여 모친과 아들을 남긴 채 전국을 돌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 경남 함안의 포도원교회가 운영하는 효친원’, 부산역 앞의 바른손교회 등에 전전하다가, 구포 3동 지역의 어느 교회 목사님의 소개를 받고 부활의 집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최 형제님은 부활의집에 잘 적응하면서 직장을 구하여 보람 있게 지내던 중, 1227일 공사현장에서 감전사고로 추락하여 크게 다쳤습니다. 긴 입원치료를 받고 이듬해 222일 회복하면서 퇴원을 하여 지내던 중 동료들의 술 꼬임에 음주를 하더니 자진퇴거와 재 입주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부활의집을 떠나버렸습니다. 참으로 재활의 길이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까요. 주님의 너그러운 손길로 인도하시길 빕니다.


 


 

95일차/ 2018.11.18.()

심S권 형제(1954년생)

1995101일 입주함. 하반신 장애를 가졌다고만 기록된 심 형제님... 도무지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 군요. 일주일 후 108일 무단퇴거 했고, 1997219일 다시 찾아와서 형주정신병원에 입원요청을 하여 행려환자로 입원시켜드렸는데, 그해 1216일 부활의집 생활을 하고 싶다고 해서 퇴원시켜 들어왔습니다만 2~3일도 못되어 결국 떠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실 곳에서 지냈으면 좋겠는데... 기도밖에 방법이 없군요.


 


 

96일차/ 2018.11.19.()

고S화 형제(1951년생)

19951010일 입주함.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근처에서 태어난 고 형제님은 줄곧 서울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지금도 서울 일산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들도 5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군 제대 이후 울산 서울 등지에서 직장생활을 전전하였습니다. 1980년쯤엔 사우디로 또 1987년도엔 리비아로 나가 일한 적도 있었는데, 불행이도 리비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그 후로 거의 타락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타락의 전초는 군 제대 후 울산 직장생활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일정한 계획도 없이 될 대로 되라며 살았다는 겁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하여 사회에서 냉대 받던 세월에 열등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울산시절 한 여인과 몇 년간 동거한 이후 지금까지는 줄곤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고 형제님은 지난 9년 여간 알코올 중독과 노숙생활의 나락에 뒹굴던 중 어느 날 실려 간 게 부산의료원 시료과였답니다. 그곳서 우연히 부활의집을 소개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마음을 다잡고 적응하며 지내던 중, 거의 몇 년 간을 거의 휘청거리면서 걷던 마비된 하체가 1115일 힘을 얻고 멀쩡히 낳아진 기적 같은 경험을 하고 어찌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형제님은 1225일 첫 성탄마찬 행사를 마치고 다음날 무슨 마음이었는지 말없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건강을 유지하면서 지내고 계실까요?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련지요. 주님의 은혜의 손길만 기도할 뿐입니다.


 


 

97일차/ 2018.11.20.()

최M규 형제(1975년생)

19951016일 부전동 부전시장에서 장사하시는 김윤진 집사님이 시장통에서 쓰러져 발작 증세를 하는 형제님을 데려왔습니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살았다는 최 형제님은 스물한 살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부산까지 오게 된 사연은 훗날 확인되었지만 지적장애와 정신질환과 간질대발작 질환이 겹친 정말 불행한 청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덩치는 씨름선수 같이 큰데 아이같이 집안 환경을 줄줄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탄광의 광부였고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남동생 하나와 살았답니다. 어릴 적 언젠가 엄마는 집을 나갔고 그 후 아버지도 탄광촌을 떠나 소식이 없자 할머니가 두 손자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두 형제는 학업도 중단하고 결국 헤어져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아마 애기 때부터 간질을 앓았던 모양인데 지금껏 5~6년간 용케도 신체상은 건강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을 거품을 물고 쓰러져 몇 분간 발작 증세를 보일 때는 처음 보는 우리로는 너무 당황되고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경찰을 통하여 행려환자로 시립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최 형제님은 대남 시립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매월 꼬박꼬박 찾아가 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처럼 의지하는 모습을 보고 가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 형제님은 오랜 기간을 신분을 찾지 못해 그곳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부턴가 아부지, 아부지하면서 팔짱을 끼고 병원을 나와서 같이 살고 싶다고 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러 해가 흘렀고 천신만고 끝에 최 형제님의 신분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적장애 1급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이 손 쉬었습니다. 그래서 병원도 시립 행려자 신분에서 김해의 T 정신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1년이 훨씬 지나서 원장님과 상의 끝에 일단 명절 기간에 며칠만이라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최 형제님은 나오면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병원으로 입원하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5년쯤 지나자 이젠 원장님이 단기 퇴원과 입원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짧지만 부활의집 생활이 가능해 졌습니다. 하지만 병원으로 들어가면 투정과 반항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사고도 일으켰습니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화상도 입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쳐 상해도 입히고... 그래서 묶여 특별보호실에 혼자 있기도 하고... 참 힘들고 어려운 보호자 노릇이었지만 정은 점점 더 들어갔습니다. 20119320주년 기념 제주도 여행 시 비행기를 타고 56일간의 일정은 너무너무 좋아라했습니다. 그래서 23일에는 결단을 하고 긴긴 병원생활을 정리하고 부활의집으로 완전 퇴원하였습니다. 최 형제님은 꼬박꼬박 약도 잘 먹고 형님들과도 잘 지내면서 잘 적응해 갔습니다. 형님들이 집안일을 할 때는 자기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재촉하기도 하고, 어딜 나들이 하면 반드시 제 가방을 꼭 쥐고 누구도 손도 못 대게 하는가 하면, 도로가 주거지 주차장 우리 차 자리에 서서 다른 차를 못 대게 종일 지켜서 있는 다든지... 웃지 못 할 일들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때론 정신병 발작으로 옷을 훌러덩 벗고 나신으로 대도로 차를 다 세우고 경찰에 잡혀서 찾아가 데려와야 했던 일, 아버지 기다린다고 동네골목에 종일 턱을 괴고 쪼그려 앉아 있기가 일수여서 동네 할머니들의 귀염을 받기도 하는 등 동네의 귀염둥가 되었습니다. 이러던 최 형제님이 2016년 봄엔가 종종 아부지’ ‘을 믿고 부활의집 형님들의 말을 안 듣고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폭력사태나 손으로 유리창 파손해 상처와 피가 낭자한 일도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 너무 싸고도니까 애들처럼 버릇이 나빠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좀 거리를 두고 동등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부지가 나를 미워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더 어깃장과 반항이 늘어서, 어느 날은 크게 꾸짖다가 상황이 긴박해서 힘으로 제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날로 옷가지를 몇 개 들고 나간다고 동네를 배회하다가 경찰에 의해 돌아오는 등, 점차 그런 횟수가 늘더니 710일쯤인가 나간 후 며칠을 돌아오지 않아서 급기야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사실 가출신고는 가족관계가 아니면 접수를 받지도 않는데 우리 사정을 잘 아는 경찰이 접수를 해 주셨습니다. , 그런데 웬일입니까? 최 형제님이 부산대병원 응급실에 들어와 3일 만에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마침, 회갑 생일을 맞이하려는 날 713일에 말입니다. 이미 최 형제님의 소식을 알지 못한 채 내 회갑연을 축하하고자 온 5~6명의 손님과 우리 부활의집 가족 등 14~5명이 허둥지둥 식사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장례기간과 이후 여러 날을 힘겹게 보내야 했습니다. 평생 경험하지 못한 우울 증세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젠 아빠라 안부를 거예요.’, ‘나 아부지 미워요.’ 라고 하는 말이 귀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하던 모든 일들과 목사직을 놓고 날 모르는 외딴 곳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제게 큰 아픔을 남기도 떠났습니다. 오래 전부터 친부와 친모가 연락이 닿았던 터라 부산지방법원에 법률적 보호자 권한을 취득할 수 있는 성년후견인 신청을 허락받고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막상 형제님을 보내는 날 친부도 친모도 오시질 않았습니다. 부산에 사는 친모는 장례가 마친 며칠 뒤 찾아와 제 손을 잡고 펑펑 울고 돌아가셨습니다. 석연찮은 형제님의 변사는 제가 우겨서 검찰이 부검까지 마쳤으나, 부검결과와 병원의 사망원인이 달랐기에 이의 제기 절차는 저로서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98일차/ 2018.11.21.()

문S준 형제(1955년생)

19951020일 입주함. 경남 울주군이 고향이라는 문 형제님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중퇴한 이래 농사를 지으며 줄 곳 살았다고 합니다. 현재도 농사짓는 모친이 생존해 계시고 여동생 셋과 남동생 하나가 있다고 했습니다. 29세 때 결혼 한 아내는 5년 전 출산도중 안타깝게 사별하였고 슬하에 장남(18)과 딸(15)과 막내아들(10)이 있는데 모두 남동생이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34세 나이에 삶을 비관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나와 처음 얼마간 방황하다가 정신을 차려 몇 푼 안 되는 준비한 돈 다 털어 식당을 차렸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식당업을 실패하고 접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몸뚱이 하나로 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장사, 막노동, 등 전전하면서 이런저런 몸도 많이 상했습니다. 골반수술과 장기간의 병원생활로 가진 돈 모두 털고 시장 주변에서 술과 날일로 하루살이처럼 연명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410월 부산의료원에 행려환자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와 주지도 않는 버림받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노모님과 아이들 형제들도 생각났지만 연락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을 찾아온 애빈교회와 목사님을 만났고 퇴원하여 부활의집을 찾은 겁니다. 문 형제님은 얼마 후 곧 주방장이 되어 많은 식구들의 부엌일을 척척 거침없이 해 나갔습니다. 특히 자기가 있던 부산의료원 행려병동 위문방문 시는 자신의 만두 솜씨를 뽐내며 정성과 기쁨으로 해냈습니다. 이후 직장도 구해서 월급도 받아보고 자립해 나가서 살겠다고 나가더니 다시 직장을 잃고 재 입주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 형제님은 19985월 무슨 사연이었는지 무단으로 떠나간 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부지런하고 일손이 척척 돌아가는 문 형제님이 아련히 기억납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가족 곁으로 돌아가셨는지... 주님의 은총을 빌어봅니다.


 


 

99일차/ 2018.11.22.()

윤S수(1960년생)

1020일 문S준 형제님과 함께 입주, 그날 밤에 나감. 아마 부산의료원에서 같이 가자고 하며 왔었나본데 본인에게는 뭔가 맞지 않았나 봅니다. 취침 이후시간 언젠가 조용히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얼굴도 그 이상의 기억이나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주님의 가호를 빌어봅니다. 잘 인도해 주시라고...


 


 

100일차/ 2018.11.23.()

김J규 형제(1954년생)

19951023일 입주함. 경남 창원이 고향인 김 형제님은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에 취직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고 합니다. 입대 전 5년간의 직장생활도 해 봤으나, 제대 후에는 광고업에 발을 딛게 되었고 3년 정도의 동거생활 이외에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봄에 사업을 실패한 이후 마음이 타락하여 술과 구걸을 벗 삼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지금도 광고업계에는 자신이 있다는 김 형제님은 내일의 재기를 위하여 마음을 새로이 하고 준비하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김 형제님은 부활의집에서 얼마 후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 출근을 하던 중 19964월에 무단히 부활의집을 떠났는데, 19975월경에 재 입주를 했는데 알고 보니 지난 1년여를 연산 정신병원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후 김 형제님은 동래정신병원과 형주정신병원 등 여러 곳을 드나들었습니다. 수차례 부활의집도 드나들었고 김 형제님은 그간 정신병원에만 찾아 돌아다녔던 겁니다. 이른바 정신병원 의존증(?)이랄까. 아무튼 형제님은 1998826일 무단이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시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건강하게 지내시는지... 기억에 떠오르는 얼굴을 상기하면서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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