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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1000일 기도에 불러보는 1000명의 영혼들(10명)
작성자 hongsulk1956
작성일자 2018-11-27
조회수 259


 

71일차/ 2018.10.24.()

김J태 형제(1949년생)

1995.2.15. 입소. 경남 고성이 고향인 김 형제님은 입소할 당시 부산시립병원 행려병동에서 가명 김정오로 지내다 왔기에 당분간 김정오로 부르다가 주민등록 신분을 찾아 바로잡았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님과 누나가 각각 한분씩 계시는데 연락두절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형제님은 가정의 어려운 형편가운데 자라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도회지로 나왔다고 합니다. 닥치는 대로 행상 등을 하다가 결국 선원생활로 접어들어 오래토록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한때 폐결핵을 앓았으나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으며 지금껏 미혼으로 지내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부랑생활을 되풀이 하던 중 본회 부활의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야윈 얼굴에 마른기침을 간간 하시던 형제님, 그래도 항시 얼굴에 웃음을 띠던 모습이 선합니다. 5월에 한번 나갔다가 6월에 돌아온 이후 8월엔 생보자 확정이 되었고 1113일 자진 퇴소하였다고 기록되었군요. 지금쯤 많이 늙었겠는데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고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사시는지... 주님의 은혜의 날개아래 있기를 빌어봅니다.


 


 

 

72일차/ 2018.10.25.()

송J익 형제(1957년생)

1995.3.6. 입주. 대구가 고향인 송 형제님은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님 둘과 누나 둘이 있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정상황이 어려워 졌고 가족은 뿔뿔이 헤어졌다고 합니다. 송 형제님은 젊은 세월을 바닥 생활로 보내다가 2년 전 어느 날 대구에서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큰 사고로 척추 장애를 입게 되었고 그 후 생보자가 되었습니다. 형제님 역시 부산시립병원에서 연고자가 없어서 퇴원 후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에 우리 부활의집을 소개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은 몇 차례 부활의집을 드나들다가 105일 소지품을 챙겨 떠나간 지 6개 여월 만에 어느 날 119 응급차로 한중병원 응급실에 중태의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김홍술 목사는 사태의 위중함을 알고 바로 부산의료원 응급실로 옮겼고 연이어 2차에 걸쳐서 수술을 하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제님은 321일 끝내 사망했고 경찰은 사인이 의심되었는지 부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김홍술 목사는 담당검사를 찾아가 장례를 허락받아 쓸쓸히 가족 없이 눈물의 기도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부검결과도 알지 못한 채... 아직도 뭔가가 찜찜한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아실 겁니다. 진실을... 아마 송 형제님 영혼에 진정한 안식을 주셨을 겁니다.


 


 

73일차/ 2018.10.26.()

서I진 형제(1960년생)

1995.3.20. 입주. 전남 벌교가 고향인 서 형제님은 15세 때부터 부모형제와 헤어져서 부산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누님 둘과 형님 셋이 있으나 모두 연락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채 거친 세파를 홀로 살아오다가 사고로 한쪽 눈이 실명되어서 늘 어두운 생활을 하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른 손 절반이 절단된 3년 전부턴 아예 부랑생활 즉 걸인생활로 전락했다는 군요. 입주 하던 날은 마침 김홍술 목사가 서면 근처에서 배회하는 서 형제를 만나 부활의집을 권유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 서 형제님은 안정을 찾고 주민등록 신분도 정리하여 결국 830일 생보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 형제님은 1010일 스스로 살아보려는 계획에서였는지 자진 퇴거의사를 밝히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딛고 지금껏 어떻게 사시고 있는지... 주님의 선하신 인도를 빌 뿐입니다.


 


 

74일차/ 2018.10.27.()

정I덕 형제(1943년생)

1995.3.25. 입주, 경남 울주군이 고향인 정 형제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난한 젊은 날을 거쳐 결혼하여 살던 중, 12년 전 아내와 세 아들과 헤어진 이후 이제껏 타락생활을 전전하였습니다. 현재 아이들은 처가에서 아내가 키우는 것으로 알지만 만나지도 만날 수도 없는 처량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뇨로 발가락이 괴사되어가는 중 부산의료원 신세를 지다가 원목실을 통해서 부활의 집을 소개받고 오시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온순한 성격으로 공동체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던 중 직장을 구해 출근도 하였으나, 결국 음주를 이기지 못하고 1029일 자진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땐 50대 초반이었으나 지금은 70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 되었겠군요. 어디서 어떻게 사시는지...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빌어봅니다.


 


 

75일차/ 2018.10.28.()

모C일 형제(1949년생)

1995.4.1. 입주, 부산 초량이 고향인 모 형제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극장 간판일과 일반간판 등을 주로 생업(13)을 삼으며 살았습니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딸 하나를 두고 형제로는 형님 둘이 있습니다. 이혼 후 4년 동안 바닥인생을 헤매며 살던 중 행려환자가 되어 부산의료원 시료과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퇴원하면서 원목실의 안내를 받고 우리 공동체에 오게 되었으나 오자마자 음주에 빠져들었습니다. 모 형제님은 바로 부산의료원으로 입원했으나 안타깝게도 417일 사망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경찰로부터 교회의 장례식을 가족이 원치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지막 배웅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생애와 삶이 하느님의 품에서 큰 위로를 받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76일차/ 2018.10.29.()

주T수 형제(1952년생)

1995.4.7. 입주, 경남 합천이 고향인 주 형제님은 가족으로 남동생 셋과 여동생 하나가 있으나 본인은 미혼입니다. 형제님은 들어오던 날 상담도 깊이 나누지도 못한 채 저녁식사 후 경건회 도중 자진해서 퇴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지금 쯤 60대 중반을 넘어선 연로한 몸으로 어디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주님의 선하신 인도를 기도할 뿐입니다.


 


 

77일차/ 2018.10.30.()

금J문 형제(1934년생)

1995.4.11. 입주. 부산 동대신동이 고향인 금 형제님은 현재 가족관계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밝히기 싫어서 그런지 고아 출신인지 모르나 얼굴은 야위고 창백한 모습일 뿐 모진 생을 산 얼굴은 아닌 고운자태가 엿보였습니다. 형제님은 지난 설날 이후 꿈속에 나타는 귀신들의 괴롭힘에 고통을 받으며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하다가 영양실조로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으로 입원조치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기력이 회복이 되자 원목실을 통해 우리 공동체에 오시게 되었는데 조용한 성품이지만 잘 적응하며 지냈습니다. 보름정도 지난 25일에는 진갑잔치도 조촐히 해 드리고 후원하는 한의원을 통해 보약도 지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위 아랫니가 모두 빠져서 후원치과를 통해 틀리까지 해 드렸으나, 이듬해 14일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가 보수파출소를 통해서 찾아 모셔왔는데 결국 며칠 뒤 110일 말없이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 못할 사연을 안고 방황하시다 가족 곁으로 가신 것 같기도 한데...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쯤은 80대 중반의 노인이실 텐데 주님만이 아실 금 형제님... 하느님의 선하신 가호를 빌 뿐입니다.


 


 

78일차/ 2018.10.31.()

김M하 형제(1951년생)

1995.4.12. 입주, 경남 통영이 고향인 김 형제님은 일찍이 동거 생활하던 처와 8년 전쯤 헤어진 후 타락생활을 걷게 되었습니다. 자개 농방에서 기술을 익히고 살다가 가정을 세우는데 실패하자 곧장 선원을 지원하여 배를 탔습니다. 뱃사람이 되자 점점 주량은 늘고 생활이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결과 몸도 망가지고 결국 부산의료원 시료과에 행려환자로 입원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병원서 몸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나가봐야 갈 곳도 없고 하니 같은 행려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자원해 봉사 겸 생활을 함께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부활의집을 알게 되자 원목실에 부탁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김 형제님은 한동안 건실히 공동체 생활을 잘 적응하며 지냈는데 72일 음주와 더불어 주사를 부리다가 어쩔 수 없는 강제퇴거 조치로 부활의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간간 발생하는 강제퇴거... 주님의 인도로 어떤 삶을 사시는지... 미안한 마음이 다시 밀려옵니다. 건강과 평안을 빌 뿐입니다.


 


 

79일차/ 2018.11.1.()

박B석 형제(1917년생)

부활의집에 입주하신 분은 아니고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애빈교회에 출석하셨던 교우님이신데 첫 출석 등록일이 정확히 없군요. 당시 80에 가까운 박 어르신은 동사무소에서 추천받은 지역 빈민 중 몇 분 중 한분이셨습니다. 구포역 뒤편 한 귀퉁이 찌그러져간 작은 가건물에서 홀로 사시는데 병환은 없지만 목이 앞으로 굽어있고 아주 천천히 걸음걸이를 하시는 정도로 지내시는 분이셨습니다. 적은 생활지원금을 매월 찾아가 꼬박꼬박 인사하며 전해드리자 1년여가 지났을까 어느 날 자진해서 교회로 찾아오신 분이셨습니다. 충북 제천이 고향이라는 박 어르신은 가족과 친지가 없다고 하셨고 정부의 생활보조금을 받아 생활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르신의 신심의 모습은 특이했습니다. 남루한 양복이지만 중절모자에 지팡이를 짚으시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북구청 앞에 소재한 애빈교회까지 걸어서 오셨습니다. 게다가 3층의 계단을 힘겹게 난간을 잡고 올라오신 후 입구에서부터 중절모를 벗고 지팡이를 가지런히 놓으신 다음, 천천히 십자가와 강단이 있는 단상 앞으로 다가와 자세를 다시 여미십니다. 두 손을 위로 올렸다가 모아 내리면서 박수를 세 번 치시고 허리 굽혀 절을 세 번 하시는 모습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 예배모습은 일제시절 신사 앞에서 하던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말리지 않고 정성과 경건을 다하는 자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어르신은 그렇게 서로 왕래하며 지내시다가 1997102일 교회근처 한중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우리교회가 장례를 주관했는데 동사무소와 협력하여 집 세간 정리도 하고 무허가 집은 구청이 없애기로 했습니다. 놀라운 건 집안 살림살이를 정리하는데 방의 장판아래 만 원짜리 지폐가 50여장 이상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어르신은 그렇게 당신의 장례준비를 해 놓고 가셨던 겁니다. 하느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없는 위로와 사랑을 받으시며 안식하실 박 어르신... 한없이 추모하고 또 추모합니다.


 


 

80일차/ 2018.11.2.()

최S일 형제(1940년생)

1995.5.2. 입주, 경남 밀양이 고향이신 최 형제님은 2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였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14세 때 가세가 기울어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김해 한림정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 부산으로 다시 이사를 했으나 형님이 사업에 실패하자 온 가족이 길바닥에 나 앉았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 한쪽 눈을 실명한 채 외눈이라 군대는 면제를 받았으나 27세 때 다행히 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슬하에 11녀를 두고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15~6년을 살았을까?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살인미수 혐의를 받아 교도소에 갇혔고 3년을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출소하여 아내를 찾았는데 아내는 가족생계를 위해 다방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아내와 끝내 결합하지 못하고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내가 맡기로 하고 형제님은 홀가분하게 홀몸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막 40여세가 되었을 때인데 마음을 잡지 못하고 20여년을 전국을 떠돌이로 이곳저곳 흘러 다니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활의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10여 일만에 말없이 떠났던 최 형제님은 2년 뒤 331일 스스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형제님은 몇 개월을 못 버티고 음주와 정신병원 입원 등을 반복하였습니다. 결국 72일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다시 짐을 챙겨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 방랑과 고난의 연속... 최 형제님의 걸음에 주님께서 은혜의 햇빛을 비춰주시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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